숫자 하나만 보면 믿기 어렵다. 21.1km를 56분 51초에 달렸다. 1km당 평균 페이스는 2분 41초. 에티오피아의 요미프 케젤차가 8월 23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미디어 마라톤 시우다드 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자 하프마라톤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종전 기록은 우간다의 제이콥 킵리모가 지난 3월 리스본에서 세운 57분 20초. 무려 29초를 단축했다.

7km에서 이미 승부를 걸었다

출발선의 기온은 6°C, 약한 바람이 부는 이상적인 레이스 컨디션이었다. 케젤차는 우간다의 딜런 키피에코와 케냐의 브라이언 킵코레 두 명의 페이스메이커 뒤에 붙어 출발했다. 사전 인터뷰에서 "58분대 진입이 목표"라고 밝혔던 만큼, 초반 5km는 km당 2분 45초 페이스로 13분 45초에 통과했다.

그런데 7km 지점에서 케젤차가 갑자기 페이스메이커를 떠나 혼자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10km 통과는 27분 19초. 직전 5km 구간을 13분 34초로 끊으면서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 시점까지는 킵리모의 세계기록 페이스보다 19초 느렸다.

진짜 드라마는 15km 지점에서 시작됐다. 10~15km 구간을 13분 22초에 주파하며 15km 통과 기록이 40분 41초. 킵리모의 리스본 페이스보다 11초나 빨라졌다. 뒤에서 바람이 밀어주는 구간을 만나자 km당 2분 40초까지 페이스를 끌어올렸고, 20km 지점을 54분 04초에 통과했다. 10~20km 구간만 26분 45초라는 경이로운 숫자였다.

마지막 1.1km는 2분 32초. 세계신기록을 직감한 케젤차는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며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런던 마라톤 데뷔전 1시간 59분의 남자

케젤차에게 세계기록은 낯선 경험이 아니다. 그는 2024년 10월 발렌시아에서 57분 30초로 생애 첫 하프마라톤 세계기록을 세웠다. 이후 킵리모가 2025년 바르셀로나에서 56분 42초를 기록했지만, 경기 조건이 세계육상연맹 규정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아 공인받지 못했다. 그리고 올해 3월 킵리모가 리스본에서 57분 20초로 공식 세계기록을 가져갔다.

케젤차는 올해 4월 런던 마라톤에서도 충격을 안겼다. 마라톤 데뷔전에서 1시간 59분 40초를 기록하며 역대 데뷔 최고 기록을 세운 것. 트랙 5,000m(개인 최고 12분 46초)에서 시작해 도로 레이스로 무대를 넓힌 지 불과 몇 년 만에 마라톤과 하프마라톤 모두에서 세계 정상급 기록을 보유하게 됐다.

경기 후 케젤차는 "하늘을 날아갈 듯 기쁘다. 여기까지 오는 여정이 길어서 초반 며칠은 피곤했지만, 오늘 아침에는 완전히 컨디션이 올라왔다"며 "초반에는 보수적으로 가려 했는데 몸이 너무 가벼워서 전부 쏟아붓기로 했다. 이 기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소감을 전했다.

여자부는 테스페이가 압도

여자부에서는 에티오피아의 포티엔 테스페이가 1시간 3분 57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2위와의 격차가 상당했던 완벽한 독주였다.

55분대 진입도 가능할까

케젤차의 56분 51초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공인 하프마라톤 기록이다. 킵리모가 바르셀로나에서 세운 비공인 56분 42초는 있지만, 공식 세계기록으로는 케젤차가 56분대 벽을 처음으로 깼다. 그가 런던 마라톤에서 보여준 1시간 59분대 기량을 생각하면, 하프마라톤 55분대 진입도 머지않은 미래에 가능해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케젤차의 레이스 전략이다. 보통 세계기록 도전은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오히려 10km까지 킵리모의 페이스에 뒤처져 있었다. 15km 이후부터 km당 2분 40초로 가속하며 후반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네거티브 스플릿'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이는 그가 가진 지구력의 깊이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29세인 케젤차는 이미 트랙에서도 5,000m 12분 46초, 10,000m 26분 49초의 개인 기록을 보유한 선수다. 트랙의 스피드를 도로 위 지구력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대표적인 사례다. 앞으로 마라톤 풀코스에서도 2시간 벽 돌파를 진지하게 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이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케젤차가 세운 세계신기록은 세계육상연맹의 공식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킵리모의 57분 20초도 아직 최종 인증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이 정도 마진의 기록이라면 인증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제 남자 하프마라톤의 기준선은 56분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