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3종에 입문하고 대회 영상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역대 최고의 선수는 누구지?" 그런데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하와이 코나의 장거리 왕들과 올림픽 디스턴스의 단거리 스피드스터는 서로 다른 무대에서 싸워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설의 기준도 '우승 횟수', '무패 기록', '올림픽 금메달', '코스 레코드'로 각각 다르게 써 내려갔습니다.
이 글에서는 각 시대와 거리를 대표하는 이름들 — 데이브 스콧, 마크 앨런, 폴라 뉴비-프레이저, 크리시 웰링턴, 알리스테어 브라운리, 얀 프로데노, 구스타프 이덴까지 — 의 기록을 확인된 사실 위에서 정리해 봅니다. 전설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철인3종이 어떤 스포츠인지 훨씬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와이 6승, 두 거인의 시대
아이언맨 월드 챔피언십이 열리는 하와이 코나에서 가장 많은 우승(6회)을 기록한 남자는 둘입니다. 첫 주인공은 데이브 스콧입니다.
- 데이브 스콧: 1980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1982년, 1983년, 1984년, 1986년, 1987년까지 총 6회 정상에 섰습니다. 그는 코나 코스에서 처음으로 10시간, 9시간, 8시간 30분 벽을 차례로 깬 선수로, 1994년에는 40세의 나이로 준우승을 차지하며 '나이의 벽'도 깨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1993년에는 아이언맨 명예의 전당 첫 헌액자로 선정됐습니다.
- 마크 앨런: 스콧의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앨런은 1989년 '아이언 워'로 불린 명승부에서 첫 우승을 신고한 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4연속 우승, 1995년 통산 6번째 우승으로 스콧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1989년 아비뇽에서 열린 첫 올림픽 디스턴스 세계선수권도 제패했고, 1995년 우승 당시 37세의 나이는 당시 최고령 우승 기록이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두 사람이 세운 기록들은 아이언맨이 단순한 '완주 이벤트'를 넘어 최고 수준의 경쟁 무대가 됐음을 보여줍니다.
코나의 여왕, 그리고 무패의 여제
여자부에는 더 압도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폴라 뉴비-프레이저는 1986년부터 1996년까지 10년간 아이언맨 월드 챔피언십에서 총 8회 우승하며 '코나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 통산 24승: 뉴비-프레이저는 세계 각지의 아이언맨 대회에서 1986년부터 2002년까지 통산 24승을 거뒀는데, 이는 지금도 깨지지 않은 최다 기록입니다.
- 1995년의 좌절과 1996년의 부활: 1995년에는 결승선을 얼마 남기지 않고 탈진해 주저앉는 모습이 중계됐지만, 이듬해 가장 똑똑한 레이스로 꼽히는 경기력으로 8번째 우승컵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크리시 웰링턴은 '완벽'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운 선수입니다.
- 4회 우승 + 전무후무한 무패: 영국인 최초로 아이언맨 월드 챔피언십을 제패한 웰링턴은 2007년, 2008년, 2009년, 2011년 총 4회 우승했고, 아이언맨 디스턴스에서 출전한 13번의 레이스를 모두 우승으로 장식하며 은퇴했습니다.
- 2009년 코스 레코드: 2009년 코나에서 세운 8시간 54분 02초는 여자 코스 기록으로 5년간 깨지지 않았습니다. 2011년에는 자전거 사고 여파로 몸 상태가 온전치 않다는 평가 속에서도 4번째 타이틀을 따내 '멘탈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남겼습니다.
올림픽을 두 번 제패한 브라운리 형제
장거리와 달리 올림픽 디스턴스(수영 1.5km·자전거 40km·달리기 10km)의 왕은 영국의 알리스테어 브라운리입니다.
- 사상 첫 올림픽 2연패: 그는 2012년 런던 올림픽과 2016년 리우 올림픽을 연달아 제패하며 철인3종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 2개를 수집했습니다.
- 형제가 만든 시상대: 2012년엔 동생 조니 브라운리가 동메달, 2016년엔 조니가 은메달을 따며 두 대회 모두 시상대에 형제가 나란히 섰습니다.
- 동생을 부축한 형: 2016년 9월 멕시코 코수멜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시리즈 결승전에서 알리스테어는 열사병으로 비틀거리던 조니의 팔을 어깨에 둘러메고 결승선까지 끌고 가 함께 골인하는, 스포츠 역사에 남을 장면을 만들었습니다.
형제는 철인3종을 '개인 스포츠'가 아니라 가족과 팀이 함께 싸우는 스포츠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기록을 다시 쓴 현대의 전사들
최근 세대에서는 '한 선수가 올림픽과 아이언맨을 모두 제패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현실이 됐습니다. 그 중심에는 얀 프로데노가 있습니다.
- 베이징의 금메달리스트: 독일의 프로데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깜짝 금메달을 따낸 뒤 장거리로 전향했습니다.
- 코나 3승 + 코스 레코드: 2015년, 2016년, 2019년 아이언맨 월드 챔피언십을 3회 제패했고, 2019년에는 마라톤을 2시간 42분 43초에 달려 총 7시간 51분 13초의 코스 레코드로 우승했습니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두 훈련 파트너가 이어받았습니다. 도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크리스티안 블루멘펠트가 2021년 아이언맨 세계선수권을 품에 안더니, 구스타프 이덴이 2022년 코나 데뷔전에서 7시간 40분 24초로 프로데노의 기록을 약 10분이나 앞당기며 정상에 섰습니다.
- 구스타프 이덴(1996년생): 아이언맨 70.3 세계선수권 2회(2019·2021) 우승에 이어 도쿄 올림픽 8위, 그리고 2022년 코나 우승까지 — 단거리·중거리·장거리를 오가는 '노르웨이식 올라운더'의 대표주자입니다.
전설의 발자취, 한국 아마추어에게 남긴 것
전설들의 기록은 프로만의 이야기로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이 지킨 원칙은 아마추어에게도 그대로 통합니다.
- 자기 페이스가 최고의 전략: 스콧과 앨런이 8시간을 나란히 달리고도 58초 차이로 갈렸던 레이스는, 결국 '누가 끝까지 자기 페이스를 지켰는가'의 승부였습니다. 남의 페이스에 휩쓸리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건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 수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 크리시 웰링턴처럼 늦은 입문에서 출발해 세계 정상에 오른 사례는 '수영을 못해서 못 한다'는 핑계가 통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 한국에도 이어지는 계보: 한국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 허민호 선수가 사상 처음 출전했고, 그 허민호가 2024년 tvN '무쇠소녀단'의 코치로 나서 아마추어 도전자들을 지도하며 대중과 만났습니다. 통영 월드 트라이애슬론컵과 제주 국제대회에 도전하는 국내 아마추어들도 저마다의 '코나'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다음 전설의 이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코나의 기록을 노리며 수영장과 자전거, 러닝 트랙을 오가고 있습니다. 전설의 계보는 끝나지 않았고, 그 시작점은 언제나 '출발선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기록을 쫓든 완주를 쫓든, 첫 발걸음을 내디딘 당신의 레이스가 곧 이 역사의 다음 페이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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